snow · 2026.6.29 13:09 · 조회 1
휴 에버렛의 비극 — 다세계 해석을 만들고 잊혀진 천재
1959년 봄, 프린스턴 대학원생 휴 에버렛 3세(Hugh Everett III)는 코펜하겐의 닐스 보어 연구소를 찾아갔습니다. 28세의 젊은 물리학자는 2년 전 자신의 박사 논문에서 발표한 혁명적 이론을 설명하러 온 것이었습니다. 다세계 해석(Many-Worlds Interpretation).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을 뿌리부터 뒤집는 이론.
하지만 그를 기다리던 것은 따뜻한 환영이 아니었습니다.
닐스 보어(Niels Bohr)의 조교 레온 로젠펠트(Léon Rosenfeld)는 에버렛의 이론을 "혼란스럽고 비물리적"이라고 일축하였습니다. 보어 자신은 에버렛과의 면담을 거의 거절하다시피 하였고, 짧은 만남에서도 에버렛의 핵심 주장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에버렛이 덴마크를 떠날 때, 그의 이론에 대한 물리학계의 판결은 이미 내려져 있었습니다. 무시.
에버렛은 코펜하겐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물리학을 완전히 떠났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천재의 탄생 — 워싱턴 D.C.의 소년
휴 에버렛 3세는 1930년 11월 11일, 미국 워싱턴 D.C.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휴 에버렛 주니어는 군인 출신의 공무원이었으며, 어머니 캐서린과는 에버렛이 어릴 때 이혼하였습니다. 에버렛은 어머니와 함께 자랐지만, 아버지와의 관계는 평생 소원하였습니다.
어린 에버렛은 기이할 정도로 조숙하였습니다. 12세에 아인슈타인에게 편지를 써서 철학적 질문을 던졌고, 아인슈타인은 실제로 답장을 보냈습니다. 고등학교에서는 수학과 물리에서 독보적인 실력을 보였으며, 가톨릭 대학교에서 화학공학을 공부하다 물리학의 매력에 완전히 빠져들었습니다.
1953년, 에버렛은 프린스턴 대학원에 입학하였습니다. 지도교수는 존 아치볼드 휠러(John Archibald Wheeler). 훗날 블랙홀이라는 용어를 만들고, 리처드 파인만을 지도한 것으로도 유명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물리학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하나의 질문이 모든 것을 바꾸다
1954년 어느 밤, 기숙사 방에서 에버렛은 친구들과 셰리주를 마시며 양자역학을 토론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문득 하나의 질문을 떠올렸습니다.
"파동함수가 관측할 때 붕괴한다면, 관측자 자신은 어떻게 되는가?"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관측 행위가 파동함수를 하나의 확정적 상태로 붕괴시킵니다. 하지만 에버렛은 이것이 근본적으로 불만족스럽다고 느꼈습니다. 관측자와 피관측 시스템을 구분하는 명확한 경계는 어디에 있는가? 관측자 자신도 양자적 존재라면, 관측 과정을 묘사하는 슈뢰딩거 방정식에 관측자도 포함되어야 하지 않는가?
에버렛은 혁명적인 답을 제안하였습니다. 파동함수는 절대로 붕괴하지 않습니다. 관측이 일어날 때, 관측자와 관측 대상을 포함하는 전체 시스템이 중첩 상태로 진화합니다. 그 결과, 서로 다른 관측 결과에 해당하는 지류들이 모두 동등하게 실재합니다. 우주는 분기합니다.
이것이 에버렛의 상대적 상태 해석(Relative State Interpretation), 훗날 데이비드 도이치에 의해 다세계 해석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론의 시작이었습니다.
박사 논문의 험난한 탄생
에버렛은 1956년 박사 논문 초안을 완성하였습니다. 지도교수 휠러는 이 아이디어의 참신함에 흥분하였지만, 동시에 물리학계의 반응을 걱정하였습니다. 휠러 자신도 보어를 깊이 존경하였으며, 코펜하겐 학파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습니다.
휠러는 에버렛에게 논문을 대폭 수정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원래 논문은 137페이지에 달했지만, 최종 제출 버전은 약 37페이지로 줄어들었습니다. 가장 도발적인 표현들은 삭제되거나 완화되었습니다. 에버렛은 마지못해 동의하였습니다.
1957년 7월, 에버렛의 논문 "상대적 상태 양자역학의 공식화(Relative State Formulation of Quantum Mechanics)"가 Reviews of Modern Physics에 게재되었습니다. 같은 호에 휠러가 지지 논평을 실었지만, 학계의 반응은 거의 없었습니다. 논문은 세상에 조용히 발표되었고, 조용히 잊혀졌습니다.
코펜하겐의 벽
에버렛의 이론이 외면당한 이유는 단순히 너무 급진적이어서만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양자역학의 철학적 기반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던 코펜하겐 학파의 권위가 절대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닐스 보어는 1922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였으며, 양자역학을 탄생시킨 창시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코펜하겐 해석은 보어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가 1920년대에 공동으로 발전시킨 것으로, 당시 물리학계의 공식 교리와 다름없었습니다. 이것에 도전한다는 것은 물리학의 대부에게 싸움을 거는 것이었습니다.
에버렛이 코펜하겐을 방문하였을 때, 그의 이론에 가장 강경한 반응을 보인 것은 로젠펠트였습니다. 그는 에버렛이 양자역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하였고, 이 발언은 에버렛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에버렛은 훗날 "그들은 내 논문을 읽지도 않은 것 같았다"고 회고하였습니다.
물리학을 떠나다
박사 학위 취득 후, 에버렛은 물리학계에 남으려 했지만 자리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대신 그는 펜타곤 산하 무기 시스템 평가 그룹(Weapons Systems Evaluation Group, WSEG)에서 핵전략 분석가로 취직하였습니다. 수학적 재능을 무기 체계에 적용하는 일이었습니다.
에버렛은 이 분야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습니다. 핵전쟁 생존자 수 예측 모델을 개발하였고, 게임 이론을 군사 전략에 적용하는 연구를 수행하였습니다. 그의 논문 일부는 수십 년간 기밀로 분류되었습니다.
하지만 에버렛의 내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최대 업적이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한다는 사실. 그것은 서서히 그를 갉아먹었습니다.
사생활의 붕괴
에버렛은 낸시 고어(Nancy Gore)와 결혼하여 딸 엘리자베스와 아들 마크를 낳았습니다. 하지만 가정생활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에버렛은 알코올에 의존하기 시작하였고, 담배를 줄담배로 피웠습니다. 그는 가족과의 정서적 거리가 멀었으며, 집에서도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었습니다.
아들 마크는 훗날 이렇게 회고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집에 있었지만, 사실 항상 없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그의 마음은 언제나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에버렛은 자신의 다세계 해석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꺼내지 않았습니다. 물리학에 대한 이야기 자체를 회피하였습니다. 그것은 너무 아픈 주제였습니다.
이론의 부활
1970년대 중반, 에버렛의 이론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부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물리학자 브라이스 드위트(Bryce DeWitt)가 에버렛의 이론을 재발견하고, "다세계 해석"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드위트는 에버렛의 이론이 코펜하겐 해석의 근본적인 모순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1973년, 드위트는 에버렛의 원래 논문과 그에 대한 주석을 묶어 The Many-Worlds Interpretation of Quantum Mechanics라는 책을 출판하였습니다. 이 책은 물리학계에 에버렛의 이름을 다시 알렸습니다.
1977년, 물리학자 데이비드 도이치(David Deutsch)가 텍사스 오스틴 대학에서 에버렛을 방문하였습니다. 그것은 에버렛이 자신의 이론에 대해 물리학자와 나눈 몇 안 되는 심층 대화 중 하나였습니다. 에버렛은 여전히 자신의 이론에 대한 확신을 잃지 않았지만, 그것을 공개적으로 방어할 에너지는 이미 소진된 뒤였습니다.
마지막
1982년 7월 19일, 휴 에버렛 3세는 버지니아주 맥클레인의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습니다. 향년 51세. 과음과 흡연, 그리고 좌절의 세월이 그를 앗아간 것이었습니다.
그는 유언으로 자신의 유해를 쓰레기로 버려달라고 하였습니다. 아내 낸시는 이 요청을 따르지 않았지만, 그의 재는 결국 쓰레기통에 버려졌습니다. 딸 엘리자베스는 아버지가 죽은 지 몇 년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녀는 유서에서 다세계 해석의 어느 지류에서 아버지를 만나기를 바란다고 썼습니다.
마크 에버렛과 Eels
에버렛의 아들 마크 에버렛(Mark Everett)은 록 밴드 Eels의 창설자이자 리더입니다. 마크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 거의 교감하지 못하였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도, 마크가 어머니로부터 소식을 들은 것은 이미 몇 시간이 지난 뒤였습니다.
2007년, 마크는 BBC 다큐멘터리 제작에 참여하였습니다. 제목은 Parallel Worlds, Parallel Lives (평행 세계, 평행한 삶). 그는 아버지를 알기 위해 아버지의 동료들을 만나고, 아버지의 물리학을 이해하려 노력하였습니다. 한 인터뷰에서 마크는 말하였습니다.
"저는 항상 아버지가 나와 함께 있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아버지는 문자 그대로 다른 세계에 있었던 것입니다."
Eels의 음악에는 상실, 고독, 그리고 평행한 삶에 대한 갈망이 깊이 배어 있습니다. 아버지의 그늘이 아들의 예술 속에 살아 있습니다.
유산 — 뒤늦은 인정
오늘날 다세계 해석은 물리학자들 사이에서 코펜하겐 해석에 이어 두 번째로 선호되는 양자역학 해석입니다. 2011년 물리학자 맥스 테그마크와 션 캐럴(Sean Carroll) 등이 수행한 설문에서, 응답한 물리학자의 약 18%가 다세계 해석을 지지한다고 밝혔습니다. 양자 컴퓨팅의 발전과 함께 그 지지는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에버렛이 살아있었다면 이 변화를 목격하였을 것입니다. 자신의 이론이 교과서에 실리고, 수천 편의 논문에 인용되며, 대중 과학책의 주제가 되는 것을. 자신이 무시당하고 쫓겨난 그 물리학계가 결국 자신의 이론을 받아들이는 것을.
하지만 에버렛은 그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다세계 해석이 옳다면, 어딘가의 지류에서 에버렛은 아직 살아 있을 것입니다. 코펜하겐에서 보어로부터 인정받고, 아이들과 함께 웃으며, 자신의 이론이 세상을 바꾸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에버렛이. 그 지류의 에버렛은 행복할 것입니다.
우리 지류의 에버렛은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이 이 이야기의 가장 슬픈 역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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